
[카이신] 파정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우리가 서로에게 닿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필요할까?
카이토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으로 발을 내딛으면 어린 소년의 발자국이 남았다. 수를 셀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필요한 발자국이 얼마인지 알 수 없었기에. 쿠로바 카이토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 모래사장의 가운데에 서있었다. 마치 자신이 두 세계를 가르는 지점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위 아래로 무늬 하나 없이 깔끔한 하얀 옷은 마치 카이토 자신이 무언가의 시작점이 되는 것만 같은 착각에 이르게 했다. 자신도 무엇의 시작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낯선 세계에서 쿠로바 카이토가 할 수 있는 일은 온전히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는 일 뿐이었다. 그것이 제가 살아있는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쿠로바 카이토는 마주했다. 나 하나 뿐일 것이라 믿었던 세계에 잠들어 있었던 쿠도 신이치는 잠들어 있었다. 따뜻한 모래를 침대 삼아, 포근한 하늘을 이불 삼아 잠든 쿠도 신이치는 눈을 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카이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흔적을 남기는 것’이 쿠도 신이치, 당신에게 걸려 막힌 채였다. 자신의 뒤를 따라 길게 늘어진 발자국이 그동안 걸어온 자신의 길을 증명하고 있었다. 발자국이 멈춘 곳은 쿠도 신이치, 당신의 앞이었다.
카이토는 잠든 신이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감긴 눈 위를 덮은 긴 속눈썹이 아름답다고, 카이토는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새하얀 옷을 입은 소년은, 맑았다. 카이토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손으로 한 번 쓸다가, 들어올려 마주 잡았다. 차가운 손목 아래 쪽에서 뛰고 있는 맥박이 느껴졌다. 바닷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이 부드러워서, 카이토는 웃었다. 자신이 웃는 이유를, 카이토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웃음, 가치 없는 것이었다. 카이토는 잠든 이 소년을 어떻게 깨워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소라를 떠올렸다. 귀에 가져다대자 먼 곳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소리가 들렸다. 카이토는 잠든 신이치의 귓가에 소라를 두었다. 사브작거리는 모래의 소리에 섞인 파도 소리가 신이치에게 스며들었다.
“들려?”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쿠도 신이치는 숨쉬고 있었고, 카이토는 미약한 그의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쿠로바 카이토는 생각했다. 쿠도 신이치가 깨어난 후에 펼쳐질 이 세계에 뒷 이야기에 대해, 그를 깨우는 것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지에 대해. 제 발자국에 닿지 못하는, 한참 먼 곳에서 쓸려내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던 카이토는 눈을 감았다.
“…들려?”
쿠로바 카이토가 눈을 뜬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귓가로 스며 머리를 울리는 파도의 소리가 카이토를 깨웠다. 눈을 뜨자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쿠도 신이치가 보였다. 해를 등지고 그림자에 숨은 쿠도 신이치의 얼굴이 향한 곳은, 쿠로바 카이토였다. 순간 카이토는 자신을 덮치는 이질적인 감각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의 세상이 붕괴하는 시점이었다.
바다와 모래 사장의 한 가운에 잠들어 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신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세계에 자신을 새기려는 발자국의 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앞을 가린 쿠도 신이치의 그림자에 대해,
쿠로바 카이토는 생각했다.
“좀 더 자지 않고.”
“…넌, 쿠도 신이치가 아니야.”
“…그럼?”
“…쿠로바 카이토.”
쿠도 신이치는 웃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뜬 소년의 눈동자는 눈부신 바다의 색을 닮았다고, 카이토는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어느새 파도는 카이토가 남긴 흔적을 하나씩 덮고 쓸며 지워내고 있었다. 쿠도 신이치의 모습을 하고 있던 눈부신 소년이 카이토를 끌어 안았다. 파도의 향이 무뎌지고 비릿하고도 생생한 감각이 카이토를 덮쳤다.
“꿈에서 깨어난 걸 축하해, 쿠로바 카이토.”
카이토는 다시 눈을 떴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눈이 부셨다. 괴도의 백색 날개에 물든 혈흔의 무게가 그를 한 없이 잡아 끌어내리고 있었다. 배에서부터 시작된 아린 감각이 가슴을 타고 입으로 올라왔다. 역한 피비린내를 뱉어낸 괴도의 흐린 눈 앞을 닦아내는 것은, 당신의 눈물이었다.
“키드, 정신차려! 잠들면 안돼! 곧 구급차가 올거라고!”
아, 이거였나. 뱉어내는 피에 탄식이 섞였다. 카이토는 장갑이 반 쯤 벗겨진 손을 쿠도 신이치에게로 천천히 뻗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카이토는 웃었다. 우리는 언제쯤 우리가 만들어낸 심연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까? 제 아무리 남겨도 힘없이 사라지던 모래사장의 발자국에 대해, 카이토는 생각했다.
눈 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동을 닮은 바다의 소리가 귀를 물들였다. 우리를 덮는 파도가 너무 높았다.
